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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 마흔 살에 하는 인생 고민

새록리뷰 2021. 1. 31. 01:38

출처 : MBC

MBC에서 집콕영화제를 진행중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영화관에 가기 힘든 관객들에게 좋은 소식인 것 같아요. <윤희에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 <잔칫날>까지 호평받은 한국독립영화들로 선정하여 더욱 뜻깊은 것 같구요. 이제 다음주 목요일 <잔칫날> 한 개의 영화가 남아있네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 포스터를 보고 무슨 영화일까 굉장히 궁금했어요. 윤승아, 윤여정 익숙한 배우들의 얼굴도 보이구요. 왼쪽에는 <사랑의 불시착>에 귀때기 역할을 한 김영민 배우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런닝 차림? 해맑게 웃고 있는 네 사람 옆에 런닝 차림의 남자 이 조합은 대체 뭘까요. 궁금증으로 시작했던 영화입니다.

다 보고 나서는, 평생 이런 영화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발하고, 따뜻하고. 이 다섯 인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정말 매력있어요. 인물들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은 영화는 오랜만이네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번글은 스포가 다량 함유될 것 같습니다.


1. 이찬실(강말금)

영화는 하나의 "영화"처럼 시작한다. 본 영화보다 좁게 가둬둔 프레임, 자글자글한 그레인이 낀 영상 안에서 극적인 음악이 흐르고, 회식 자리에서 갑작스레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는 지감독. 지감독의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던 찬실은 단숨에 일자리를 잃는다. 삶의 다른 부분은 쳐다볼 겨를도 없이 영화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연락이 오는 곳이 전혀 없다. 마흔 살의 찬실,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마흔 살의 인생 고민을 이토록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가 또 있었던가? 예전에는 한 가정의 책임을 져야하는 나이, 회사에서도 한 직급 하는 나이였다면 요즘에는 글쎄.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되면서 마흔 살이면 이래야 한다는 의무들이 조금씩 지워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정해진 길이 없다보니 오히려 그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도 많을 테다. 지금과 같은 시대의 어른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 '찬실'이다.

 

 

2. 소피(윤승아), 3. 김영(배유람)

찬실은 당분간 친한 동생이자 배우인 소피네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기로 한다. 가끔은 악플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 소피지만, 모든 일에 깜빡깜빡하는 만큼 나쁜 일도 금방 잊는다. 근심할 소에 피할 피. 지나가듯 말했던 이름 뜻이 진짜인지 장난인지 구분이 안 되지만, 아무튼 꽉 들어찬 '찬실'의 이름과 대비된다. 그 만큼 다른 성격인지라 혹시 사고를 치지않을까 약간 조마조마했지만, 그런 문제는 없었다. 좋은 친구였던 소피.

소피 덕분에 찬실 인생에 김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피의 후배이자 불어 과외를 하고 있는 단편 영화 감독 김영. 찬실은 영이 꽤 마음에 들고, 영화를 한다는 걸 알자 더욱 관심이 간다. 김영 역할의 배유람 배우가 정말 매력적으로 나온다. <엑시트>에 출연했던 얼굴이 기억이 났고, 로코물에서는 본 적이 없었지만 그냥 이 분은 로코였다. (ㅠㅠ) 부담스럽지 않게 세상 다정하고 스윗한 말투를 잘 구사하셔..

 

소피네 집에서 각각 가사일과 과외를 마치고 술을 한 잔 하러 온 둘. 찬실은 여기에 앉아있다보니 오지 야스지로의 영화가 생각나네요 라며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오지 야스지로의 대표작은 <동경이야기>다. 영은 그 영화를 봤는데, 지루했다고 했다. 자신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더 좋아한다며.

 

(좌)<인셉션>, (우)<동경이야기>

정말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사실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가도 전혀 다른 취향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갑자기 상대가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그나마 둘 다 홍콩 영화를 좋아했다는 걸로 술자리를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이날의 뒤끝이 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찬실. 영은 영화는 취향에 관한 것일 뿐이지 않느냐고. 그거 하나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영화계 종사자이지만, 찬실은 영화없이 살 수 없다고 하는 반면 영은 영화없어도 다른 부분이 삶에 꽤 차지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 그래. 듣다보니 역시 영은 좋은 사람이다. 찬실은 생각했다. 

일자리도 없어지고, 어떻게 살 지 모르겠고. 그럴 때에는 사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누군가 위로해주면 좋을 것 같고. 영을 향한 찬실의 마음도 이런 것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일까?

 

 

4. 장국영(김영민)

(좌)<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장국영 역(김영민), (우측 2장)<해피 투게더>, <아비정전>의 진짜 장국영

인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자 눈 앞에 나타난 남자, 장국영. 찬실이 홍콩 영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배우라며 언급한 장국영이다. 겨울에 런닝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이지만(왜 런닝 차림인지는 알 것 같다), 찬실의 사랑 고민과 진로 고민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다. 찬실이 옷 좀 입고오라고 하자 다음엔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귀신도 있나? 이 캐릭터의 존재가 가장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찬실이 셋방에 이사오자마자 주인집 할머니는 가운데방은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 방에 국영이 지내고 있었다. 국영에 말에 의하면 맨날 그곳에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가 사는 곳은 또 아니란다. 할머니의 딸이 생전 영화를 좋아했다고 해서 그 방에도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 가득 차있었는데 그 안에서 국영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생겨난 거 아닐까. 그가 극장에서 3시에 영화를 같이 보기로 했다는 인물도 할머니의 딸일지도 모른다. 

 

국영은 장국영이라는 이름 그 자체로 찬실에게 계속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가 지내던 방, 할머니의 딸이 지내던 방의 카세트오디오를 들고 방에 온 찬실은 영화 라디오가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를 듣게 된다. 찬실이 영화를 처음 하고 싶다 생각했던 <집시의 시간>과 관련된 녹음이었다. 때마침, 국영은 아코디언을 가져와 연주해보라고 한다. 연주를 마친 찬실은 이렇게 말한다.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그 말에 우주에서도 응원하겠노라 답한 국영은 그 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5.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할머니들은 다 알고있어요. 영과 찬실은 산책하는 길에 웃으며 사진찍는 할머니들을 보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주인집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을까. 가운데방에 들어가지말라했다가, 찬실이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자 가운데방에 가보라고 한 할머니는. 그 방에 국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할머니는 주민센터를 다니며 한글을 배우고 있었다. 찬실은 할머니의 시작문 숙제를 돕다가 눈물을 왈칵 흘린다. "꽃처럼 사람도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쓴 것은 아니었고 맞춤법이 다 틀려 있었지만. 그전에 할머니는 찬실과 마당에서 화분을 옮겨 왔었다. 나머지는 얼어서 죽었고, 살 가능성이 있는 화분만 알아보고 옮겨왔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는 어떻게 쓰는 거냐고 묻다가 저 문장을 쓴 거다. 할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그 말이 정말로 맞다. 


인생에 대한 문제도, 사랑에 대한 문제도 해결이 되어간다. 이 인물들은 찬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할머니가 쓴 시처럼,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주어진 삶은 한 번 뿐이다. 영과의 대화를 통해서, 영화가 아닌 삶의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영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있는 삶을 선택했다. 소피는 찬실 곁에 사람들을 데려다주었다.

 

보름달이 떴다. 찬실이 바라는 소원은 "우리가 믿고싶은 거. 하고싶은 거. 보고싶은 거". 우주에서 지켜본다던 국영이 영화관에서 찬실의 이야기를 보고 있나보다. 찬실에게 보내는 기립 박수. 찬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눈길 위에서 기차가 계속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