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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 그곳에선 모든 것이 영원하다

새록리뷰 2021. 2. 19. 21:25

*<2046>, <화양연화>, <아비정전>에 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푹 빠져 지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이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인데 <2046>에는 이 두 영화가 같이 녹아있다. <아비정전>의 루루(유가령) 그리고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가 <2046>에서 다시 등장한다. 영화가 끝나고 인물들이 소멸한 게 아니라 살아왔음이 느껴져 좋았다. 화양연화처럼 찬란한 순간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모든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영화는 시작과 함께 <화양연화>의 결말을 불러낸다. 옛날 사람들은 비밀이 있으면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대고 비밀을 털어놨다고 한다. 그 후에는 진흙으로 막아버렸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는 그곳, '2046'은 이 비밀들이 가득 들어찬 구멍으로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차우는 그곳을 바탕으로 <2047>이라는 제목의 무협소설을 쓴다. <화양연화> 속 수리첸과 차우가 소설을 쓰던 곳을 기억하는가? 호텔 방 2046호.

 

차우는 수리첸(장만옥)에게 싱가폴로 떠나자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혼자 싱가폴에 왔다. 이곳에서 우연히 홍콩에서 만났던 수리첸(장만옥)과 이름이 같은 또다른 수리첸(공리)을 만난다. 도박판에서 검은 거미로 불리던 수리첸(공리)은 프놈펜에서 왔다고 했다. 차우도 캄보디아에 다녀온 참이었고, 이전 연인과 이름이 같기도 한 점을 이야기하며 가까워진다. 수리첸은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도박으로 유명했고, 차우를 도와 홍콩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마련해준다. 차우는 수리첸에게 같이 떠나자고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곳에서 싱가폴에서 만났던 루루를 재회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를 사랑해 필리핀까지 쫓아갔던 그녀 루루. 차우는 루루가 자신의 이전 연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발 없는 새, 이제는 죽었다는 연인, 아비(장국영). 그 순간 그 공간에는 <아비정전>에도 수록되었던 Xavier Cugat의 노래가 흐른다. 실제 촬영 기간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개봉은 2004년이었고, 아비를 맡았던 배우 장국영은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머릿속에 아비와 장국영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루루와 차우는 함께 술을 마시고, 차우는 루루를 방에 데려다준다. 공교롭게도 루루가 묵고 있는 호텔의 호수는 2046호. 차우는 화양연화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렇게 2046이라는 공간이 탄생한다. 2046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하다. 2046으로 가는 기차를 탄 사람들의 목표는 단 하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되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차우는 그 옆방 2047호에 자리를 잡는다. 2046호에는 루루가 나가고 난 뒤, 호텔 사장의 큰딸이 잠시 살았다가 바이링(장쯔이)이 새롭게 들어온다. 그도 차우만큼 연인 관계가 복잡한 인물이었다. 차우는 바이링의 외모를 보고 관심을 보인다. 원하는 모든 걸 빌려줄 수 있다면서, 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 날부터 밤을 함께 보낸다. 그러나 차우는 바이링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고자 하지 않았다. 잠자리를 할 때마다 돈을 줬고, 아침까지 머무르지 않았다. 차우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바이링은 그런 관계마저 유지하려고 하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르고 그를 떠난다. 

 

바이링이 오기 전 잠시 묵었던 호텔 사장의 큰딸 왕징웬(왕페이)이 2046호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인 남자 직원(기무라 타쿠야)과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결사 반대한다. 왕징웬은 그의 연인이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한다. 그가 떠난 뒤, 방에서 못 다한 대답을 일본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갑시다", "가십시다", "좋아요". 화가 난 아버지가 고함을 칠 때는 호텔에 꼭 오페라 곡이 크게 울렸다. 오페라 "Norma" 중 Casta Diva.

 

몇 년이 지나도, 만날 수 없어도 왕징웬과 일본인 연인 사이의 사랑은 지속되었다. 차우는 호텔 사장의 눈을 피해 그들이 편지를 교환하도록 돕는다. 왕징웬도 글을 쓴다는 걸 알고, 이따금 차우 자신이 아플 때 대필을 부탁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독립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이따금씩 왕징웬을 데리러 갔다. 추억 속 어느 날 처럼 비가 내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을 핑계로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차우는 왕징웬이 일본에 있는 연인과 통화할 수 있도록 자신이 일하는 신문사에 데려간다. 창밖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금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왕징웬이 일본으로 떠나고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차우는 그에게 약속한 소설을 써서 보낸다. 왕징웬과 일본인 연인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배경은 2046이고 제목은 <2047>이다. 차우는 소설 속 일본인 남자 '탁'이라는 인물에게 자신을 대입시켰고, 왕징웬은 2046 기차 인조인간 승무원 'wjw1967'로 만들었다. 언젠가 사랑을 한 적 있던 탁은 자신이 다시금 사랑에 빠질 거라 생각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는 인조인간 승무원을 사랑했고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wjw1967은 함께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징웬은 결말이 너무 슬픈데 바꿀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1시간, 10시간, 100시간이 지나도 그는 새로운 결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의 화양연화만 생각날 뿐이었다. 해피엔딩이 가능할 지도 몰랐던 그 순간. 수리첸(장만옥)과의 시간이 아른거렸다. 소설 속 탁은 떠나고, wjw1967은 1시간, 10시간, 100시간이 지나도록 창밖을 바라본다.

 

바이링이 다시 찾아온다. 싱가폴로 출국하는데 차우에게 증인을 서달라는 부탁을 한다. 여전히 차우를 사랑하는 바이링은 그날 밤만이라도 함께 해달라고 하지만 차우는 거절한다. 빌려줄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다면서. 차우는 탁이기도 했지만, wjw1967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와 떠나려고 하지만 거절이 반복되었고, 자신과 떠나자는 이와 떠나지 못 했다. 계속 해서 과거에 머무를 뿐이었다. 바이링도 차우의 길을 따라 밟는다. 

 


[덧붙이는 생각]

 

(1) <화양연화>를 본 후 보는 것이 이해가 더 잘 되지만, <화양연화>의 차우를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캐붕이라고 느껴질 만큼 둘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사랑을 깨닫는 차우를 보면서 정신차리고 제대로 살길 과거를 떠나 나아가길 바래본다.

 

(2) <아비정전>에 잠깐 출연했던 양조위의 역할이 어쩌면 차우가 아니었을까?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의 동명이인 수리첸(장만옥)도 한 인물이 아닐까? <아비정전>의 후속으로 양조위와 장만옥이 출연할 계획이었다고 하니 그럴 지도 모르겠다. 왕감독의 영화 속 캐릭터들이 서로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3) 차우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 크게는 수리첸, 바이링 그리고 왕징웬 세 인물과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노래로도 구분이 된다고 느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수리첸하고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메인 테마, 바이링과는 왕감독 이전 영화에도 많이 나왔던 라틴 계열 음악, 왕징웬과는 오페라 음악. 

 

(4) 2046이라는 공간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속 림보와도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림보는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뒤의 공간인데 그곳에서 평생 기억할 추억 하나를 선택하는 사람만이 떠날 수 있다. 이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과거로 회귀하는 것일까.

 

(5)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50년인 2047년. 홍콩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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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를 시작으로 메가박스, 그리고 독립예술극장에서도 왕가위 특별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어요. 서울을 기준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만 작성해봅니다. (21.02.20 작성) 1. CGV 기간 2/11(목) ~ 3/3(수)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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